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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문화재]

모딜리아니 회고전 (2015년 예술의전당)

by PEOPLE 2NATURE 2015. 8. 30.

 

 

 

국내 최초ㆍ아시아 최대 규모의 모딜리아니 회고전

2015. 6. 26 - 10. 4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파리 몽파르나스 전설의 화가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 ~1920)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20세기 아방가르드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의 대표 화가이자,

35세의 짧은 생을 통해 파리 몽파르나스의 전설이 된 이탈리아 태생의 화가이다.

한 편의 드라마 같았던 그의 삶과 예술은 보편적 인간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내면세계에 자리한

심오함을 탐구하기 위한 방식으로서 인물화라는 일관된 주제 속에 집약되어있다.

국내 최초의 모딜리아니 회고전으로 마련된 이 전시는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심지였던 파리 몽파르나스의 전설로 기록된

비운의 화가 모딜리아니의 예술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전시이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모딜리아니는 그리스 조각처럼 준수한 외모, 서른여섯의 나이로 마약과 알코올레 절어 요절한 불운한 화가이다.

1884년 이탈리아 리보르노 유대계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일찌감치 가업을 걷어차고

피렌체와 베네치아의 미술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뒤 1906년 파리에 정착했다.

2년 뒤 앵데팡당전에 회화 6점을 출품해 화가로 이름을 알렸다. 

생전의 모딜리아니는 당대의 파리 사람들에게는 인정받지 못한 채 ‘주정뱅이 예술가’로 불렸다.

고흐처럼 죽은 후에야 유명해진 요절한 모딜리아니는

가난, 자폐, 결핵, 술과 마약 중독등으로 일생이 드라마틱한 예술가 였다.

타고난 미남이였던 그는 파리 화단에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자폐적인 성격 때문에 번번이 사랑에 실패를 했다.

가난했고 고독하고 궁핍했던 그는 술과 마약으로 하루 하루를 달랬다.

미소가 없었던 차가운 사람이었지만 사실 그만큼 인간을 좋아했던 화가도 없었다.

다만 그의 휴머니즘은 캔버스에서만 구현되었다.

그는 줄곧 초상화만을 그렸다.

한 장의 초상화를 위해 하루에 100장도 넘게 데생을 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는 사람을 보이는 대로가 아닌 그가 느낀 대로 그림을 그렸다.

그가 그린 여인의 얼굴들은 눈동자가 없고 가면처럼 평면적이고 도식화되어 얼핏 차갑고 무표정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살아 있는 사람처럼 ‘혼’이 느껴진다

모딜리아니는 그림마다 다른 ‘섬세한 눈’을 통해 자신의 심리 상태를 표현했다.

그가 특히 즐겨 쓴 파란색에서는 연약함, 섬세함, 우아함과 함께 삶의 비애 같은 게 느껴진다.

모딜리아니가 결핵성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나자 임신 5개월이었던 부인 잔 에뷔테른도 따라서 투신하여 자살을 했다.

‘천국에서도 모델이 되어 달라’는 남편의 말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였다.

 

모딜리아니는 왜 '인물'에 주목했나?

“내가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될 때 당신의 눈동자를 그릴 것이다.”

라고 말했던 모딜리아니의 일관된 소재는 ‘인물’이다.

그는 단순히 모델을 화폭에 그려 넣기 위한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의 교감을 원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사실이나 허구가 아닌 무의식이다.” 라고 한 그의 말처럼,

작품 속 인물들은 눈동자가 없는 텅 빈 눈으로 아득한 내면의 깊이를 담아낸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의 결과물로서 그의 예술이 빛나는 점이다.

  

예술인들의 거리 몽파르나스

프랑스 파리에서 모딜리아니가 정착했던 센느강 우안 몽마르트와 센느강 좌안 몽파르나스는

가난하지만 재능있는 예술가들이 모여있던 창작과 교류의 장소였다.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몽파르나스는 기존에 예술가들의 중심지였던 몽마르트를 뛰어넘는

파리에서 예술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중심지가된다.

이러한 흐름은 고국을 떠나 파리를 찾아온 외국인 예술가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고,

그 흐름에 맞춰 모딜리아니 역시 1909년 몽파르나스에서 작업을 시작한다.

당시 몽파르나스는 모딜리아니 외에도 샤갈, 피카소, 브랑쿠시, 키슬링, 수틴, 반동겐 등

전 세계에서 몰려든 예술가들의 집합지였다

 

에콜 드 파리 화파를 탄생시키다

 

이들은 1925년 미술평론가 앙드레 바르노에 의해 일명 파리화파로 불리는

에콜 드 파리의 중심을 이루는 작가들이었다.

1890년 이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의 약 40여년 동안

몽파르나스의 거리와 카페에서는 예술에 대한 열띤 토론이 열렸고,

많은 예술적 유행이 창조됐다.

1920년대에 피카소, 헤밍웨이, 스타인 등이

바로 몽파르나스 일대의 단골 손님이 되면서부터 몽파르나스는 유명세를 탔다.

또한 14구는 만레이나 모딜리아니, 헨리 밀러 같은 예술인들의 천국이 되었다.

 

 

 


Portraits of Women, 여인의 초상

 

 

"잔느 에뷔테른느의 초상" Portrait of Jeanne Hébuterne

1918년

46 x 29cm, 캔버스에 유화

트루아 근대미술관, 프랑스

 

모딜리아니 자신의 반려자 잔느를 모델로 한 다른 많은 그림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는 그녀를 더 근거리에서 그렸으며 엄숙한 포즈를 통해 수직성을 보다 강조하고 있다.

넥라인의 둥근 형태는 잔느를 후광처럼 감싸고 있는 모자와 유사한 효과를 발하면서 헌신적 사랑을 암시하고 있다.

 

 

 

"앉아 있는 잔느 에뷔테른느" Portrait of Jeanne Hébuterne
1918년
55 x 38cm, 캔버스에 유화
이스라엘미술관, 예루살렘


모딜리아니가 세상을 뜨기 전 마지막 연인 잔느의 모습을 담은 작품으로
양손을 모아 무릎에 얹은 채로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모습에서
그녀가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배경에 등장하는 침대와 침대 테이블 그리고 부드러운 빛의 효과와
분위기를 자아내는 색채 처리는 둘만의 은밀한 공간을 배경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대한 애정을 물씬 표현하고 있는 동시에
그들에게 닥쳐 올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하는 듯하다

 

 잔느 에뷔테른느의 실제 모습

모딜리아니와 잔느 에뷔테른느의 이야기와 초상화 (여기 Click!)

 

 

모딜리아니가 사망하자 이틀 뒤 8 개월된 둘째 아이를 임신한 체 투신자살한 비련의 연인.

천국에서도 자기 모델이 되어 달라는 14세 연상의 이기적인 남편 부탁에 초연이 목숨까지 버리고 남편의 뒤를 따른 연인.

당시 그녀의 나이 22세였다.

미술사에 전설처럼 전해내려오는 연인 모딜리아니와 쟌느 에뷔테론의 이야기이다

 

 

(금번 전시작품은 아님)

"큰 모자를 쓴 잔느 에뷔테른"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in a large hat

1918 ~ 1919경

캔버스에 유채,54 x 37.5 cm

개인소장

작품해설

 

 

 

 

 

(금번 전시작품은 아님)

 

"노란색 스웨터를 입은 잔느의 초상"

Yellow Sweater (aka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1918-1919
100x65cm, 캔버스에 유채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

 

죽기전에 꼭 봐야할 명화 1001점

 

 

"흰 옷깃의 여인 (루냐 체코프스카)"
Portrait of Woman with a White Collar(Lunia Czechowska)
1917년
81 x 60.2cm, 캔버스에 유화
그르노블미술관, 프랑스

 

체로니 작품집에 따르면 폴란드 태생의 루냐 체코프스카는 1916년 처음으로 모딜리아니를 만났다.
그녀는 훤칠한 키에 홀쭉한 얼굴형을 지닌 외모로 모딜리아니가 추구하는 인물 표현방식에 가장 부합하는 모델로서
모딜리아니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가장 선호하는 모델이었다.
이 작품은 프랑스 파리 국공립 미술관이 소장하게 된 최초의 모딜리아니 작품이다

 

 

 

"제르맨 쉬르바주의 초상" Portrait of Germaine Survage

1918년
54 x 43cm, 캔버스에 유화
낭시미술관, 프랑스 


이 초상화의 인물은 레오폴드 쉬즈바주의 부인 제르맨 메이어이다.

1918년 모딜리아니 부부가 쉬르바주의 집으로 요양을 오게 되면서 모딜리아니와 친분을 쌓게 된다.

일반적으로 얼굴 형태를 세로로 길게 늘어뜨리는 모딜리아니의 인물 작업과 달리,

이 그림은 모델의 얼굴뿐만 아니라 어깨마저 원통형으로 둥글게 그렸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젊은 여인의 초상 (루이즈)"

Head of a Young Woman(Louise)

1915년
51.1 x 37.1cm, 캔버스에 유화
트리튼재단, 네덜란드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붉은 색이 강하게 화면을 지배하고 있고
인물의 표정을 통해 보다 내면적 관찰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17년 이전까지 모딜리아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모델들이
화가, 조각가, 시인, 소설가, 화상, 컬렉터 등 사회문화계층의 인물들이었다는 점에서
루이즈라는 평범한 소녀를 모델로 그렸다는 점은
모딜리아니 후기 작품에 등장하게 될 다양한 모델 층의 변화를 암시하는 대목이다

 

 

 

 

"안토니아", Antonia

1915년
82 x 46cm, 캔버스에 유화
오랑주리미술관, 프랑스


안토니아라는 여인을 모델로 한 이 작품은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나
코와 귀는 측면에서 보여진 구도로 그려져 있고,
상체의 윤곽은 극도로 단순화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비대칭적으로 길게 일직선으로 쭉 뻗은 기나긴 목의 길이와 직선적 윤곽선은
마치 고대 건축에서 보일 듯 법한 기둥의 형상을 하고 있다.

 

 

 


Nudes, 여인의 누드

 

 

 

 

"머리를 푼 채 누워있는 여인의 누드"

Reclining Nude with Loose Hair
1917년
60 x 92.2cm, 캔버스에 유화
오사카 시립 근대미술관, 일본

 

파리의 베르트 베일 갤러리에서 열린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에 전시된 네 점의 누드 작품 중 한 점이다.
모딜리아니가 남긴 여인의 누드 작품 가운데 밀도 있는 색채사용과 완벽한 윤곽과 절제된 표현력,
그리고 모딜리아니 작품에 보편적으로 보여지는 아몬드형의 눈에 눈동자를 그려 넣은 드문 작품으로서
누드 작품 중 최고의 걸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누워 있는 누드 (셀린 하워드의 초상)"

Reclining Nude(Portrait of Céline Howard)

1918년
65 x 100cm, 캔버스에 유화
개인소장, 스위스

 

자유분방하게 드러누운 균형 잡힌 신체를 지닌 여성이 관찰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강렬한 붉은 색의 직물이 덮인 침대 위에 드러누워 다리를 관찰자 쪽으로 반쯤 벌리고,
팔은 머리 뒤로 구부리고 있으며,
얼굴은 관찰자를 향한 채 도전적이고 관능적인 눈을 보내고 있다.

 

 


 Portraits of Men, 남자의 초상

 

 

"폴 알렉상드르 박사의 초상"

Portrait of Dr. Paul Alexandre

1909년"
100.5 x 81.5cm, 캔버스에 유화
도쿄 후지미술관, 일본 

 

폴 알렉상드르는 근대미술의 열정적인 애호가이자, 많은 예술가들을 친구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 되지 않았던 자신의 수익을 모두 그들을 위해 쓰곤 했다.
모딜리아니 또한 폴 알렉상드르와 친분이 두터운 관계였으며, 그를 위해 많은 초상화를 남겼다.
모딜리아니는 한번에 만족할만한 형태를 얻을 때까지 같은 그림을 하루 저녁에 열 번도 다시 그릴 때도 있었는데,
바로 이 작품이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쉐롱의 초상", Portrait of Monsieur Chéron

1915년

46 x 33cm, 캔버스에 유화

개인소장, 스위스

 

조르주 쉐롱은 1915년 경 파리 라 보에티 거리에 갤러리 데 쟁데팡당을 연 화상이다.
모딜리아니는 1914년경 그를 위해 일했다.
이 작품은 회화재료의 변화와 반복적으로 사용한 표현법으로 인해
쉐롱의 얼굴 생김는 객관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게 그려졌지만,
쉐롱만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다.

 

 

 

 

"폴 기욤의 초상", Portrait of Paul Guillaume

1915년
74.9 x 51.1cm, 판지에 유화
톨레도미술관, 미국

 

폴 기욤은 20세기 초 파리의 가장 중요한 화상 중 한 명이었으며,
1914년부터 1916년 초까지 모딜리아니의 작품을 산 유일한 구매자였다.
이 작품은 각진 구성과 정면을 향해 앉아 있는 자세를 통해 야심찬 상인에게 생생한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다.
이렇듯 모딜리아니는 인물들의 신체적 특징을 넘어서
모델의 심리적 통찰과 감성적 분위기까지도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마누엘 윔베르 에스테베의 초상"
Portrait of the painter Manuel Humbert Esteve
1916년
100.2 x 65.5cm, 캔버스에 유화
빅토리아국립미술관, 호주

 

스페인 출신의 화가 마누엘 윔베르 에스테베의 초상으로
모딜리아니는 단순히 외모를 실제와 유사하게 그리기보다는
형태의 특징적 면에 초점을 맞추어 인물을 묘사했는데,
이 작품에서는 길고 뾰족한 턱, 작고 살짝 휘어진 입술, 아래쪽으로 확장된 눈, 특정한 의상이
모딜리아니에 의해 강조된 인물의 개성을 보여주는 요소이다.

 

 

 

 

 

 

 

"레오폴드 쉬르바주의 초상". Portrait of the Artist Léopold Survage
1918년
61.5 x 46cm, 캔버스에 유화
아테네움미술관, 핀란드

 

레오폴드 쉬르바주는 1879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화가이자 판화가이다.

쉬르바주는 건강이 악화되었던 모딜리아니를 위해 숙소를 제공해주면서 경제적,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이 작품에서 각진 선으로 구성된 쉬르바주의 얼굴은 형태와 화면의 균형에 있어,

모딜리아니의 조각 작업에서 오는 영향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샤임 수틴의 초상". Portrait of Chaïm Soutine

1917년

55.5 x 35cm, 캔버스에 유화

개인소장, 스위스

 

이 초상화에서 젊은 예술가 수틴의 시선은 강렬한 표정을 지니고 있으며,
약간 우울한 성향과 자긍심 또한 동시에 담고 있다.
회화재료의 밀도감을 강조하는 따뜻한 테라코타 색의 피부, 가볍지만 밀도 있는 붓터치에 의해
형태 요소들의 간결한 입체감이 얼굴과 목에서 두드러지게 강조된다.

 


 

Caryatids,  여인상 기둥

 

 

"붉은 여인상 기둥" (앞면)Red Caryatid(Recto)

1913년
80 x 58.5cm, 캔버스에 유화,
개인소장, 미국

 

조각가가 되고자 했던 모딜리아니의 노력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의 대표적인 여인상 기둥 작품 중 하나로 드물게 유화로 채색한 작품이다.

 

 

"여인상 기둥", Caryatid

1913-1914년 경
53 x 43.8cm, 종이에 흑연 잉크와 파스텔을 사용한 수묵화
파리 시립미술관, 프랑스

 

 

 

 

여인상 기둥

Caryatid

1914-1915년 경
49 x 32cm, 종이에 과슈
개인소장, 이탈리아

 

 


 

Modigliani and Moïse Kisling

모딜리아니와 모이즈 키슬링

 

"모이즈키슬링의 아틀리에"

Atelier of Moïse Kisling

1918년
66 x 63.5cm
캔버스에 유화
개인소장, 유럽

"모이즈 키슬링의 초상이 있는 정물"
Still life with Portrait of Moïse Kisling

1918년
74.5 x 84cm
캔버스에 유화
개인소장, 이스라엘

 

 

 


 

Works on Paper,  종이작품

 

 

"젊은 남자의 누드'

1915-1916년 경

45.2 x 28cm, 종이에 수채화

칼베미술관, 아비뇽, 프랑스

 

모딜리아니의 초기 습작이 드로잉 위주였다면,

이 작품은 펜으로 인물을 구성한 후 수채화 물감을 바탕색으로 입힌 것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조각에서 볼 수 있는 남성상을 표현하고 있다.

 

 

"여인의 얼굴"

1916년
31.5 x 23.5cm, 종이에 잉크

개인소장, 이탈리아

 

 

"남자의 얼굴"

1915-1916년 경
41.2 x 26cm, 판지에 연필, 과슈와 유화
칼베미술관, 아비뇽, 프랑스

 

 

 

"장콕토의 초상"

1916년 경

38 x 26cm, 갈색 종이에 연필

개인소장, 미국

 

 

 

 

"웅크린 누드"

1910-1911년 경
 41 x 21.5cm, 우브 페이퍼에 검정 연필
트리튼재단, 네덜란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