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히텐슈타인 박물관 명품전
루벤스와 세기의 거장들
(2015.12.12 ~ 2016.4.10)
국립중앙박물관 (용산)
관람일 : 2015. 12. 19
안내 팜플렛
리히텐슈타인 박물관
리히텐슈타인 궁정의 수집 문화 대표적인 루벤스 컬렉션이자, 유럽 최고의 왕실 박물관 중 하나인 리히텐슈타인박물관은
르네상스에서부터 바로크, 근대 비더마이어 시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수많은 명작들을 소장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예술품 수집과 작가 후원을 중요한 가업으로 여겼던 리히텐슈타인 궁정은 수세기 전부터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작품을 수집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루벤스를 포함한 바로크 작품들을 통해 명실공히 유럽 최고의 궁정 컬렉션으로 인정받게 된다.
시대를 선도했던 위대한 명작들을 미리 알아보고, 이들 작품을 높게 평가한 후원자, 수집가로서의 역할은 유럽 궁정이 가진 중요한 책무이기도 했다.
리히텐슈타인 궁정의 오랜 예술품 수집의 역사는 “수집”이 가진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가늠하게 한다.
주요 작가
피터 폴 루벤스 (Peter Paul Rubens)
1577.6.28 ~ 1640.5.30
국적 벨기에, 출생지 독일 베스트팔렌 지겐
주요작품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
독일 베스트팔렌 지겐 출생. 아버지가 정치적인 이유로 지겐으로 피해 있을 때 그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죽자 10세 때 가족과 함께 고향인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와 라틴어 학교에 다녔다.
3년 뒤 14세에 랄랭 백작부인의 시동이 되어 귀족사회의 습속을 익혔고, 화가가 될 뜻을 세웠다.
15세 때 A.노르트(1562∼1641), O.베니우스(1556∼1629) 등에게 그림을 배운 뒤 21세 때인 1598년 당당히 안트베르펜화가조합에 등록,
23세 때인 1600년에 이탈리아 유학의 꿈을 실현시켰다.
이탈리아에 머무는 8년 동안 베네치아·로마 등지에서 고대미술과 르네상스의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당시 이탈리아의 바로크화가인 M.카라바조와 카라치파(派)의 영향을 받아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 차차 명성을 얻는 한편,
만토바공(公)의 인정을 받아 그의 사절로서 외교적 사명을 띠고 에스파냐로 여행하였다.
1608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왔을 때 이미 어머니가 운명한 뒤였으나,
그는 플랑드르 제일의 화가로서 고향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1609년 플랑드르 총독 알브레흐트 대공의 궁정화가가 되었고,
10월에는 명문 집안의 딸 이사벨라 브란트와 결혼하였다.
그 뒤로는 날로 높아가는 명성과 많은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루벤스 특유의 화려하고 장대한 예술을 펼쳐나갔다.
역사화·종교화를 비롯하여 많은 종류의 제재를 작품화하였는데,
파리의 뤽상부르궁전의 21면으로 이루어진 연작 대벽화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는 그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루벤스 예술의 모든 특질을 담고 있으며 바로크회화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현란한 그의 작품은 감각적이고 관능적이며 밝게 타오르는 듯한 색채와 웅대한 구도가 어울려 생기가 넘친다.
외교관으로서도 활약하였으며 원만하고 따뜻한 인품으로 말미암아 유럽 각국 왕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1626년 아내 이사벨라가 죽은 후, 1630년 16세의 엘레나 푸르망과 재혼하였다.
1640년 팔의 통풍이 심장에까지 번져 안트베르펜에서 죽었다.
피터르 브뤼헐 (Pieter Bruegel the Elder)
1525 ~ 1569
국적 네덜란드
주요작품 "사육제와 사순절 사이의 다툼", "아이들의 유희"
16세기 가장 위대한 플랑드르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출생·성장·수업 등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으나, 아마 네덜란드 북쪽 브라반트주 스헤르토헨보스 근방의 브뢰겔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처음에는 쿡에게, 그 다음에는 히에로니무스 콕의 제자가 되어 그 밑에서 그림공부를 하였다.
1551년 안트베르펜의 화가조합에 등록하고, 다음해 프랑스·이탈리아 등지에 유학하였다.
반 에이크 이래 북유럽 자연주의에서 출발한 그는 이탈리아 유학길에서
알프스의 풍경에 감명을 받고 스케치한 풍경화를 남겼는데 그중 21점이 현존한다.
1553년 귀국하여 안트웨르펜에서 제작생활을 하다가 1563년 결혼, 브뤼셀로 이사하여 그곳을 활동 본거지로 삼았다.
그의 작품은 초기에는 주로 민간전설·습관·미신 등을 테마로 하였으나,
브뤼셀로 이주한 후로는 농민전쟁 기간의 사회불안과 혼란 및 에스파냐의 가혹한 압정에 대한 격렬한 분노 등을 종교적 제재를 빌어서 표현한 작품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 후로는 점차 구도가 단순화되고 인물수도 적어졌으며,
극적 요소를 버리고 순수하게 사실적으로 때로는 비유적으로 농민의 실상을 묘사하게 되었다.
그는 숙명적으로 대지와 깊은 인연을 맺어 그 속에서 소박하고 우직하게 살아가는 농민을
높은 휴머니즘의 정신과 예리한 사회비판의 눈으로 관찰하면서 묘사해 나갔다.
이로 인해 그는 최초의 농민화가가 되었으며, '농민 브뤼헐'로 불린다.
이 무렵의 것으로 현존하는 작품 중 판화에 비해 유화는 50점도 안 되지만,
그 작품들은 북유럽 전통의 사실성과 이탈리아에서 배운 엄격한 선(線)의 묘사를 통하여 독특한 스타일과 취향을 표현하였다.
그의 작품은 빈 미술사박물관에 많이 소장되어 있는데 "사육제와 사순절 사이의 다툼", "아이들의 유희", "바벨탑" 등과
4계절의 농촌을 묘사한 3점의 작품(4점 중의 1점은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소장). "영아학살(嬰兒虐殺)", "농민의 춤", "농가의 혼례" 등이 그것이다.
이 밖에도 베를린국립미술관 소장의 "네덜란드의 속담", 브뤼셀왕립미술관 소장의 "반역 천사의 전락(轉落)",
나폴리국립미술관 소장의 "맹인들"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안소니 반 다이크 ( Anthony van Dyck , Sir Anthony van Dyck )
1599. 3. 22. ~ 1641. 12. 9.
출생지 플랑드르 안트베르펜
플랑드르 출신의 화가. 안트베르펜에서 출생하여 런던 근교의 블랙프라이어스에서 사망.
10세경 헨드릭 반 발렌(Hendrck van Balen 1575~1632) 아래서 그림을 공부하며 곧 조숙한 천재성을 발휘하였고,
1618년 루벤스의 아틀리에에 들어와 수업한다. 1620년 안델벡의 초청으로 런던에 갔었으며,
1621~1622년엔 이탈리아 각지를 역방함. 1627~1632년 안트루펜을 중심으로 활약.
32년 런던으로 이주, 잉글랜드 왕 찰스 1세(Charles I 재위 1625~1649)의 궁정화가가 된다.
결혼한 다음 해에 죽음. 루벤스가 가지는 우아하고 궁정적인 일면을 이어 받아 신화화(神話畫),
종교화 특히 초상화에 훌륭한 재능을 발휘하고 판화도 다수 남겼다.
대표작에 "찰스 1세"(1635, 루브르 박물관)가 있다.
루벤스의 협동 제작자로 때로는 양자의 영역을 나누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하나,
차분하고 따뜻한 색채와 섬세한 데상에는 독자적인 맛이 있고 또 "자화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궁정화가에 어울리는 감미로운 정서를 내포하고 있다.
주요 작품 Review
이번에 전시된 작품 중 대표적인 작품에 대하여 관람후 리뷰한다.
작품 사진은 전시회 안내 공식 사이트와 인터넷상에 공개된 자료 중
실제 작품과 비교적 가까와 보이는 것을 골랐고
해설도 안내 사이트와 미술작품사전 등에 나와있는 것 중에서 간추렸다.
"클라라 세레나 루벤스의 초상"
피터르 파울 루벤스
1616
목판 위 캔버스에 유채
LIECHTENSTEIN. The Princely Collections, Vaduz–Vienna
이 작품은 피터르 파울 루벤스의 다섯살짜리 사랑스러운 딸 "클라라 세레나 루벤스"의 초상이다.
자신을 그리는 아버지를 앞에 두고, 클라라는 다소 장난기 섞인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보고 있다.
발갛게 물든 볼, 콧등, 다문 입술, 귀여운 이마는 생기있는 클라라의 모습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클라라의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버지를 마주하던 눈빛을 관람객 스스로 마주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된다.
어떤 걱정이나 불편함도 없이, 또렷하게 바라보는 맑은 눈망울을 마주하다 보면 오래 알고지냈던 소녀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루벤스는 딸의 얼굴을 무척 세심하게 표현하면서도 마치 미완성 작처럼 나머지 옷과 배경은 과감하게 생략했다.
그 이유는 처음부터 판매하거나 전시될 그림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애정을 담은 개인 소장품으로 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욱 더 희귀하고 이런 표현 때문에 우리는 아이의 얼굴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
클라라 세레나 루벤스는 비록 12살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지만, 이 작품을 그릴 당시에는 밝고 건강한 모습이다.
귀여운 딸의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서양미술사에 남을 시대의 거장이기 이전에 아버지였던 루벤스의 마음이 잔잔하게 느껴진다.
"성 마리아 막달레나"
귀도 레니
1615/16
목판에 유채
LIECHTENSTEIN. The Princely Collections, Vaduz–Vienna
귀도 레니는 1601년부터 로마에 체류했다.
그의 격조있는 숭고함이 드러나는 초기 역사화들은 로마와 볼로냐에서 탄생했다.
그는 말년 까지도 고전적-신화적 내용을 담은 그림만을 주로 그렸다.
신약성서에는 개종 후 그리스도의 가장 헌신적인 추종자가 되었던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와 같은 '회개하는 죄인'은 르네상스 시대에 인기 있는 그림 주제였고, 귀도 레니 또한 이 주제를 다룬 그림을 많이 남겼다.
여러 명으로 구성된 그림도 있고 한 사람의 상반신만 그려진 그림도 있었는데, 후자의 그림이 당시 경배화로서 훨씬 수요가 많았다.
부드럽게 구불거리며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위에서 내려오는 빛으로 강조된 아름다운 얼굴과 상체를 감싸고 있다.
느슨하고 대범한 필치는 막달라 마리아의 살결과 머리카락의 특징을 설득력 있게 전해준다.
머리카락을 잡고 있는 오른손은 그리스도에 대한 순응의 손짓을 의미한다.
"성 바오로의 개종", Conversion of St. Paul
피터르 파울 루벤스
1601/02
목판에 유채
LIECHTENSTEIN. The Princely Collections, Vaduz–Vienna
성 바오로의 개종은 루벤스의 중요한 초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체류 초기에 그려진 것이며, 이는 루벤스는 후기 작품세계에 주요한 역할을 했던 예술적 발전을 이루었던 시기이다.
이 그림은 그 동안 플랑드르 대가가 축적한 예술적 경험들을 집약시켜 놓은 작품이다.
우선 강렬한 색채 대비와 번쩍이는 빛의 반사는 틴토레토(Tintoretto, 1518–1594)의 그림을 연상시키고 있다.
청년 루벤스는 틴토레토의 재빠른 작업 기법이 주는 매혹적인 효과를 주의 깊게 연구했을 것다.
이 그림에서 루벤스는 힘찬 붓질로 위대한 베네치아 예술가의 기교를 모방하고 있다.
또한 바오로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을 그리기 위해 루벤스는
라파엘로(Raphael, 1483–1520),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의 작품들과 함께
프란체스코 살비아티(Francesco Salviati, 1510–1563)와 타데오 추카리(Taddeo Zuccari, 1529–1566)의 작품들도 모델로 선택했다.
비록 이들의 작품들 중 어느 하나도 직접적으로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회화적 방식에서 영감을 받아 루벤스가 바울의 개종을 다수의 인물이 나오는 극적인 장면으로 구성한 것이다.
화면이 말의 몸체들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장면에서 말들이 공감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은
젊은 루벤스가 이탈리아에서 매료되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앙기아리 전투 Battle of Anghiari> 스케치들의 영향이다.
"아기 에리크토니오스의 발견"
피터르 파울 루벤스
1616
캔버스에 유채
LIECHTENSTEIN. The Princely Collections, Vaduz–Vienna
이 작품은 그리스 신화의 에리크토니우스를 주제로 그린 것이다.
이 그림에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에게 버림받은, 뱀의 발을 지닌
레히크토니우스를 발견하는 케크롭스 왕의 딸 들이 등장한다.
루벤스는 세자매의 살결을 막 목욕을 끝내고 나온 듯 뽀얗고 아름답게 표현했다.
이 작품에는 헤르메스와 사랑에 빠지는 세자매중 하나인 에르세의 이야기도 함께 나온다.
배경의 분수에는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도 등장한다.
"아기 에리크토니오스의 발견" 작품은 전시된 123점중 가장 고가의 작품인 동시에 무려 3미터 이상의 대작이다.
"아기 에리크토니오스의 발견"은 회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주제는 아니다.
그러나 인문학에 관한 방대한 학식을 갖추었던 루벤스는 이 주제를 선택했다.
루벤스는 실제로 안트베르펜의 자택 서재에 고대 문학 작품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루벤스에게 이 신화의 줄거리는 아르카디아 풍경을 배경으로 고대의 이상적인 신체를 그려낼수 있는 좋은 소재였으며
이 장면을 그리기에 앞서 수많은 습작과 드로잉 작업을 거쳤다.
루벤스는 당대 누구보다도 고대조각에 대해 조예가 깊었던 사람으로 스스로도 고대조각을 수집했을 뿐아니라,
이탈리아 여행 도중 보았던 조각들의 외형을 수많은 드로잉으로 기록해 두었다.
그림 속의 인물
① 헤르메스, ② 헤르세, ③ 산파 노인, ④ 에로스
⑤ 메리크토니무스, ⑥ 아글라우로스, ⑦ 판드로소스, ⑧ 아르테미스
"캐비닛"
멜히오르 바움가르트너
피에트라 두라: 1625, 진열장: 1650년경
침엽수 틀에 흑단나무와 검게 착색된 배나무를 붙임, 상아, 피에트라 두라(석재 상감)
LIECHTENSTEIN. The Princely Collections, Vaduz–Vienna
당시 대표적인 가구 장인의 제품으로 이런 종류으 가구는 16세기 중반부터 유럽의 왕실이나
수집가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이 캐비냇은 각 문양을 따라 홈을 판 뒤 각기 다른 색의 돌로 박아 넣는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 기법으 꽃 장식이 매우 인상적이다.
"흙(땅)"
주세페 아르침볼도
1570
LIECHTENSTEIN. The Princely Collections, Vaduz–Vienna
이탈리아 밀라노 출생의 화가 Giuseppe Arcimboldo (1527-1593)의 작품으로
각종 미술교과서나 체험학습지에 자주 소개되어 낯익은 작품이다.
작품을 살펴보면 멀리서 바라볼때는 조금은 무서워 보이는 기괴한 얼굴이다.
하지만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서 바라보면 얼굴은 온데간데 없고, 한데 뒤엉켜 자리잡은 동물들만 가득하다.
토끼, 치타, 코끼리, 소, 사자, 숫양, 원숭이 등 각각의 얼굴 부분에 절묘하게 자리잡은 모습이 가히 천재적이다.
작가 아르침볼도는 이렇듯 교묘하게 쌓아놓은 정물들을 통해 인물을 표현한 작가로 유명하다.
이런 기괴한 얼굴은 페르디난트 1세, 막시밀리안 2세, 루돌프 2세와 같은 황제의 얼굴을 표현한 것이다.
자연 만물을 지배하고 선정을 베푸는 존재로 받아들였기 때문인지
기존의 조금씩 미화된 초상들만 보던 황제도 즐거워하며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 작품은 <흙>, <불>, <물>, <공기> 네 가지 연작 중 하나로 그려졌기 때문에 땅에 사는 동물들을 소재로 그리고 있다.
"애도"
파울 루벤스
1612년경
캔버스에 유채
PhotoⒸLIECHTENSTEIN. The Princely Collections, Vaduz–Vienna.
루벤스는 피부 표현에 뛰어난 작가이다.
위 작품에서 루벤스는 죽은 그리스도의 피부를 놀라ㅜㄹ 정도로 사질적으로 표현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서 보이는 창백함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어 참혹함이 느껴진다.
과장된 원근법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표현하였고
주변 사람들의 배치를 이용하여 보는 사람이 사건에 물입하도록 하였다.
그리스도의 주변에 있는 슬픔에 빠진 인물둘의 표현이 흥미롭다.
피터르 브뤼헐1세 작품 모작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피터르 브뤼헐2세
1607
목판에 유채
LIECHTENSTEIN. The Princely Collections, Vaduz–Vienna
이 작품은 겨울 농촌의 풍경을 묘사한 "베들레헴의 인구조사"라는
피터르 브뤼헐 2세(Pieter Brueghel the Younger)가 그린 작품으로
그의 아버지 피터르 브뤼헐 1 세(Pieter Brueghel the Elder)가 제작한 유명한 그림의 복사본이다.
성서의 루카복음서에 의하면,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호적 조사를 실시하도록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성모 마리아와 요셉은 요셉의 출생지인 베들레헴으로 돌아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마리아는 마구 간에서 예수를 낳았다.
피터르 브뤼헐 1 세는 복음서에 근거해 이 장면의 배경을 겨울 풍경으로 설정하였다.
왜냐하면 예수의 탄생은 12 월에 일어난 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업을 하는 도중에 그는 이 주제를 위해 완전히 새로운 설정을 하게 되었다.
성서 속 풍경보다는 당시의 생활을 묘사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푸른 색 망토를 입고 당나귀를 탄 마리아의 모습이 전경 오른편에 보인다.
톱을 어깨에 메고 마리아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요셉의 모습은 마을의 부산 함 속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마을에는 나무를 마차에 싣고, 돼지를 도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또 빙판길을 가로질러 썰매 위에 술통을 끌거나 스케이트타기 또는 눈싸움을 하면서 즐거운 시 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도 볼 수 있다.
"수집가의 갤러리"
코르넬리스 더발리외르 1세
1640경
목판에 유채
Private collection, on permanent loan to LIECHTENSTEIN. The Princely Collections, Vaduz–Vienna
후기 르네상스 시대 이후에는 갤러리에 단지 미술 작품을 전시 할 뿐만 아니라,
달팽이, 진주, 유리공예품과 그 밖에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아름답고, 진귀하고, 특이한 것들을 모두 함께 전시했다.
당시 사람들은 ‘종교와 관련된 역사화’를 감상하면서 깨달음을 얻었고,
그 깨달음이 종교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가져온다고 확신했다.
따라서 조형예술 작품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일은 영주와 부유층 사이에서도 점점 인기가 높아졌다.
이런 생각으로 인해 화랑(Gallery)의 내부를 주제로 삼은 작품이 등장하여 1610년경 안트베르펜에서 유행했다.
이러한 “갤러리 그림(gallery painting)”이 탄생하고 유행하게 된 시점은 안트베르펜과 브뤼셀의 귀족, 상인들 사이에서 신구 예술품 수집이 번창한 시기와 같다.
화랑화 중에는 실제 소장품이 아닌 유명 작품이나, 해당 화가의 작품을 더해 상상의 소장품을 그린 경우가 적지 않다.
이 그림은 조명이 잘 되어있는 격자천장의 긴 화랑을 묘사하고 있다.
당시의 유행처럼 벽에는 그림들이 빼곡히 걸려있고, 몇 점은 바닥에 세워져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한스 마카르트
1875
LIECHTENSTEIN. The Princely Collections, Vaduz–Vienna
미인의 대명사로 많이들 알고있는 클레오파트라는 B.C. 69년에 태어난 이집트의 여왕(재위 B.C. 51~30)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최후의 통치자였다.
그녀는 사실 이집트인이 아니라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 왕통의 혼혈이었으나 높은 교양과 미성을 자랑하고,
특히 미녀로서뿐만 아니라 그 지성과 수완으로 이집트의 종교에 깊이 관심을 보여
태양신 라(Ra)의 딸을 자칭하며 이집트인들의 깊은 신뢰를 얻었다.
강대한 로마 제국의 세력 앞에서 기울어져가는 이집트의 국세를 만회하려고 노력한 비극의 제왕이기도 하다.
이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와의 악티움 해전에서 패한 후, 독사를 이용해 자살하려는 순간을 표현한 작품이다.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과장된 모습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19세기 오스트리아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였던 한스 마카르트의 작품이다.
그는 당시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주로 고전에 대한 주제들을 화려하게 표현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유명세를 따라 극적이고 화려한 그만의 작품들은 "마카르트 스타일"로 불리기도 한다.
"바다의 선물"
야코프 요르단스,프란츠 스니데르스
1640/50
캔버스에 유채
Private collection, on permanent loan to LIECHTENSTEIN. The Princely Collections, Vaduz–Vienna
이 작품은 야코프 요르단스, 프란츠 스니데르스의 "바다의 선물"이다.
이 대형 회화에는 왼쪽의 높은 바위에서 시작해 오른쪽의 넓은 평지로 이어지는 바닷가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전경은 거북, 조개, 바닷가재, 게와 함께 수많은 다른 종의 물고기들을 포함하여 대부분 죽은 해양생물이 어지럽게 얽혀있는 장면이다.
뒤쪽 바다로부터 바다의 신인 넵튠(Neptune)과 그의 수행원들을 포함한 인물군이 몰려들고 있다.
왼쪽 상단에 솟아있는 바위 꼭대기에 신들의 전령인 헤르메스(Hermes)가 에로스와 함께 앉아 있다.
붉은 뺨을 가진 강인한 요소적 인물 (elemental figures)들은 안트베르펜 화가인 야코프 요르단스(Jacob Jordaens, 1593–1678)의 전형적인 화풍이다.
인물들의 창백한 피부색과 틀어진 자세는 이 그림이 요르단스가 안트베르펜을 이끄는 화가로 출세하는 1640년에서 1650년 사이에 그려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죄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
피터르 파울 루벤스
1615/22
LIECHTENSTEIN. The Princely Collections, Vaduz–Vienna
그림에서 그리스도가 오른손에 부활의 깃발을 들고 앉아있다.
그의 오른발은 해골의 머리 위에 있고 왼발은 뱀 위에 있는데, 해골과 뱀은 죽음을 상징한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빨간색 망토와 함께 그가 죄와 죽음을 극복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뒷쪽에는 지옥불이 타고 있고, 천사들은 승리의 상징물을 들고 있다.
왼쪽에 있는 천사는 트럼펫을 불고 있고 중간에 있는 천사는 그리스도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고 있으며
오른 쪽에 있는 천사는 승리의 종려나무를 들고 있다.
그리스도는 마치 고전 속 영웅들과 신들의 아버지인 제우스처럼 장엄한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원래 안트베르펜의 세인트 왈부르가교회(St. Walpurgis Church)에 있는 묘지 위에 높이 설치되어 있었다.
루벤스는 이 점을 고려하여 그림에서 단축법을 사용하였다.
과감한 생략을 통해 2차원의 평면에서 극도의 현실감을 주고, 위에서 내려다보는듯한 회화 작품의 위엄과 장엄함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사냥 정물"
얀 페이트
LIECHTENSTEIN. The Princely Collections, Vaduz–Vienna
사냥은 귀족들의 가장 중요한 특권 중 하나이었다.
성대하게 개최되는 몰이 사냥에서 알 수 있듯 사냥은 궁정 연회에서나 군주임을 과시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었다.
바로크 시대에는 비교적 새로운 장르였던 사냥정물화는 수렵을 통해 얻는 승리감을 전달하고 자랑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주로 여러 종류의 사냥한 동물과 사냥 총, 사냥도구들을 탁자나 석판 위에 늘어놓는 식이었다.
이 그림에서처럼 식기나 주 방용품을 함 께 놓기도 했다.
플랑드르 화가 얀 페이트는 사냥정물화 분야에서 최고로 평가 받는 거장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냥정물화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그의 대규모 사냥정물화는 고성을 장식하는 용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평화를 위해 기회의 여신 오카시오를 잡는 알리 4세"
피터르 파울 루벤스
1628년경
패널(목판)에 유화, 62cm x
LIECHTENSTEIN. The Princely Collections, Vaduz–Vienna
루벤스는 1622년 프랑스 앙리4세의 미망인이었던
마리 데 메디시스 (마리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는다.
그때 그녀의 남편을 위해 그린 것 중의 하나가 이 작품이다.
그림의 윗부분 중앙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인물이 자리잡고 있고
그 왼쪽에는 "기회"를 의인화한 오카시오가 있다.
그의 옆으로 ㅇㄹ개가 달린 시간의 신 시투르누스다 두손을 내밀면서 접근을 한다.
또한 오른 편 영웅의 뒤에는 쿠구를 쓴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가 서 있다.
평화를 목젠에 두고, 기회는 다가 오며, 지혜의 여신은 뒤에서 밀어주는 상황을 표현하는
앙리 4세를 칭송하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St. Francis of Assisi before the Crucified Christ"
Peter Paul Rubens
1625
목판에 유채
47x78cm
리히텐슈타인 박물관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초상
Portrait of Elector Friedrich III the Wise of Saxony
라쿠스 크라나흐, Cranach (the Elder)
1532이후
목판에 유채, 80 x 49 cm
Liechtenstein Museum, Vienna
세레자 요한, John the Baptist
상세내용 확인못함
"성 히에로니무스가 있는 풍경"
마르틴 판헤임스케르크
1547
LIECHTENSTEIN. The Princely Collections, Vaduz–Vienna
이 작품은 르네상스의 위대한 발명이었던 원근법이 돋보이는 작픔으로
보는 사람이 그림안에 광활하게 펴쳐진 로마시대의 폐허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갖게 한다.
마르틴 판헤임스케르크는 참회하는 성 히에로니무스를 그리며
배경에 고재 로마의 유적을 생생하게 담았다.
1532년부터 5년정도 로마에 머물면서 그렸던 많은 습작 덕분에 로마에서 그리지 않았음에도
로마의 유적을 실감나게 표현할 수 있었다.
그림 속의 로마 유적
① 샤투르누스 신전의 잔해에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 나오는 인물상 기둥
② 바티칸 벨베데레 궁의 헤라클레스와 안타이오스 조각
③ 콜로세움
④ 둥근 지붕의 판테온
⑤ 트라이누스 원기둥
⑥ 강의 신 티베리우스와 로마를 건국한 로몰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그리고 이들을 키운 어미 늑대
성 히에로 니무스 ( 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
이름의 뜻은 '신성한 사람.' 영어식 이름은 '제롬'(Jerome)
암브로시우스·그레고리우스·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와 함께 라틴의 4대 교부(Church Father)로 불린다(347-420년)
헬라어역본인 70인역(ⅬⅩⅩ)을 히브리어 원문과 직접 대조하여 라틴어역본인 「불가타성경」(Vulgata)을 번역하였다.
342년 크로아티아 남서부 달마티아(오늘날 '유고')의 스트리돈에서 출생했다. 354년 수사학과 문법,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으나 중병을 앓으면서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한 후에 360년 교황 리베리오에게 세례를 받았다.
373년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우스 주교에게 헬라어와 성경 주석 방법을 배웠고,
374-380년 안디옥에 머무는 동안 유대 랍비에게 히브리어를 배웠다.
379년 성직자로 서품을 받고 382년 교황 다마수스 1세의 비서로 임명되어 교황의 지시로 라틴어성경 번역에 착수하여 405년(혹자는 404년) 완역했다.
그뒤 420년 9월 30일 80세를 일기로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의 최대 업적은 통속적으로 번역되어 산재해 있던 여러 고대 라틴어성경 번역본들을 원전에 맞게 정확하게 개정하여
교회의 표준성경으로 자리매김하도록 성경의 권위를 바로 세웠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높이 평가된다.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는 성모마리아"
비트리오 크리벨리
1460/1465경
LIECHTENSTEIN. The Princely Collections, Vaduz–Vienna
이 작품은 배경에 실제로 존재하는 풍경을 그려넣은 르네상스 초기 양식을 보여준다.
아침해가 밤의 어둠을 몰아내는 것을 묘사한 배경은
아기 예수가 세상을 환하게 비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기 예수가 들고 있는 체리는 달콤한 맛 떄문에 천국의 과일이라고 하는데,
이는 현실에서는 고난 속에서 살고 있지만
천국에서는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성모와 아기예수, Virgin and Child"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é Esteban Murillo
1650년대 초
갠버스에 유채
성모 마리아 흉상
도메니코 귀디
1670년경
"제노바 귀족의 초상"
안토니 반 다이크
1624
캔버스에 유채
LIECHTENSTEIN. The Princely Collections, Vaduz–Vienna
피터르 파울 루벤스, 안토니 반다이크, 야코프 요르단스는
안트베르펜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대표적인 폴랑드르 화가들이다.
이들은 폴랑드르 전통에 토대를 두고, 이탈리아의 바로크 등 국제적 흐름을 수용하여
소위 "폴랑드르 바로크"를 완성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얀 페르물런(1589-1656)의 초상"
피터르 파울 루벤스
1616
LIECHTENSTEIN. The Princely Collections, Vaduz–Vienna
루벤스는 자신의 초상화 모델들의 개성 뿐만 아니라 그들의 내면 가장 깊숙이 숨겨져 있는 특징들을 끌어내는 능력이 탁월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영혼’까지 도 불어 넣으면서 피와 살이 있는 인간으로서 표현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 얀 페르물런의 초상" 에서 우리는 총경과 스페인 함대 제독의 자리까지 오른 역사적으로 대단히 성공한 인물과 마주한다.
그리고 루벤스는 능숙하게 이 인물의 성격을 묘사하였다.
얀 페르물런은 1589년 안트베르펜의 영향력 있는 오래된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 내용은 화면의 왼쪽 상단 모서리에 있는 문장과 하단에 명시 된 날짜와 나이로 파악되었다.
루벤스는 화려한 경력을 막 시작하기 전 27살의 페르물런의 모습을 3/4 초상화로 그렸다.
이 초상화는 당시 유행하 던 검은 색 의상을 갖춘 기품 있는 젊은 남자가 오른쪽으로 몸을 반쯤 돌리고 의자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머리와 몸통을 분명하게 나누고 있는 커프스와 빳빳한 흰색 주름 칼라는 당시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주는 의무적인 표시였다.
페르물런은 왼손에장갑을 들고 있고 오른손으로는 검은 색 모자를 쥐고 있는데, 매우 자신감 있는 태도로 관람객을 보고 있다.
"서쪽으로 바라본 베니스의 산 마르코 광장과 종탑"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의 서편과 종탐"
조반니 안토니아 카날, 일명 '카날레토'
1723
LIECHTENSTEIN. The Princely Collections, Vaduz–Vienna
조반니 안토니아 카날 (Giovanni Antonio Canal)은
이탈리아의 베두타(주로 도시나 마을 등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상세히 묘사한 회화·소묘·에칭)화가이자 풍경화가이다.
그의 풍경화는 거의 사진과 같은 사실적 표현과 정확한 세부 묘사로 주목 받아 왔다.
당시 유럽 왕실과 명문가 자손들은 고대 유적을 돌아보고 당대의 이탈리아 예술을 익히기 위해 이탈리아와 유럽 각국으로 그랑투어를 떠났는데,
귀국할때 꼭 사가지고 오는 필수 기념품이 이러한 베두타 (Veduta, 사실적인 이탈리아 풍경화)이었다 (요즘의 기념사진 역할과 비슷).
베네치아 베두타는 당시 귀족들에게 그랑투어의 상징물이었으며, 18세기 귀족적인 수집의 핵심적인 주제였다.
높이 솟은 종탑과 낮게 늘여진 건물 사이의 대조와 함께 극적인 빛의 효과는 이 작품을 매우 흥미롭게 만들어주고 있다.
바로 이러한 빛의 효과와 극적인 원근법의 활용, 유머러스한 인물상이 이 작품을 특징지어주며, 이는 카날레토 작품의 전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산이 있는 풍경"
유스 더몸퍼르
1620
LIECHTENSTEIN . The Princely Collections, Vaduz–Vienna
유스 더몸퍼르는 풍경화 전문으로 안트베르펜 에서 커다란 스튜디오를 운영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에 큰 영 향을 준 사람은 피터르 브뤼헐 1세이다.
더몸퍼르가 가장 생산적인 활동을 한 시기는 1620년대로 이 때 "산이 있는 풍경"이 제작되었다.
그의 그림들 속 에는 강한 이탈리아적 요소들이 담겨 있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그가 이탈리아를 여행했다고 말한다.
이 주장은 특히, 그가 이탈리아로 가는 길에 건너갔을 것으로 보이는 알프스 산맥 에 대한 지식을 보여주는 산맥 묘사에서 입증된다.
"산이 있는 풍경"은 미약한 인간의 존재를 알프스 산맥의 위대함과 대비시켜 보여주고 있다.
그림 안에 서있는 인간들은 무상함의 상징으로 자연의 영속성과 대비되고,
회화적 공간은 마치 점진적으로 조립된 것처럼 보인다.
또 장식적인 성격의 솟아오른 산맥에서 실제와 상상, 움직임과 정체, 이성과 비이성이 모두 함께 흘러드는 것처럼 보인다.
"토비아가 있는 풍경"
얀 브뤼헐 1세
1598
동판에 유채
LIECHTENSTEIN. The Princely Collections, Vaduz–Vienna
풍경화는 16 세기 말까지 수십년동안 역사화로부터 분리된 하나의 독립적인 장르가 되었다.
풍경화 중에서도 마을 풍경, 겨울 풍경 또는 산이나 숲을 그린 풍경화와 같은 장르들을 발전시킨 중요한 작가로는
얀 브뤼헐 1 세(1568–1625), 유스 더 몸퍼르(1564–1635), 등이 있다.
피터르 브뤼헐 1 세의 아들인 얀 브뤼헐 1 세는 다수의 풍경화, 꽃정물화 등을 남겼는데, 특히 일찍부터 작은 크기의 풍경화에 집중했다.
그는 풍경화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고 사실주의적 풍경화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광활한 풍경에 활기를 불어넣는, 전경의 작은 인물들이 묘사된 뛰어난 풍경화들이 여러 점 있다.
또한 그는 성서 속이나 역사 속의 장면들을 풍경화와 결합시키기도 했다.
사진 속 작품인 "토비아가 있는 풍경 Landscape with the Young Tobias"은
얀 브뤼헐의 초기 작품 중 하나이며 또한 가장 중요한 풍경화이기도 하다.
이 그림의 색채는 오후의 분위기가 뿜어져 나오고, 상상의 강가를 배경으로 축제 분위기가 가득하다.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형형색색의 집단 가운데 토비아가 천사들과 함께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는 장면은 무척 구분하기 어렵다.
이것이 바로 얀 브뤼헐 풍경화의 전형이다.
많은 수의 작품들이 자세히 관찰해야만 하는 신화적, 또는 역사적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이는 작품의 주제를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 작품에서처럼 관객들이 필요한 성서의 지식과 경험을 갖추고 있어야 함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나룻배가 있는 강변 풍경"
살로몬 판라위스달
1631년
캔버스에 유채
LIECHTENSTEIN. The Princely Collections, Vaduz–Vienna
가톨릭 국가인 플랑드르와 달리 북부 네덜란드는 신교 국가였다.
이 무렵 북부 네덜란드는 막강한 해양 무역 국가로 발돋움하였고,
그 결과 해운, 선박, 상업 등에서 부를 획득한 중산 시민층이 사회의 지배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이들의 요구와 취향은 예술에도 적극 반영되었는데,
극적이거나 역동적인 기존의 종교화나 역사화 대신 사실 묘사에 충실한 초상화나 풍경화, 정물화, 풍속화와 같은 실내 장식용 그림들이 환영받았다.
그러므로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은 이탈리아나 플랑드르의 바로크 양식과는 다른 독자적인 흐름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흐름에는 성상 숭배와 교회 장식을 부정하는 신교의 영향도 크게 작용했다.
미술품에 대한 수요의 변화에 따라 화가들은 점차 자신의 장점이 부각되는 그림에 집중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풍경화, 정물화, 초상화 등 각 분야의 전문 화가들이 등장하게 된다.
위의 "나룻배가 있는 강변 풍경"과 아래의 "뚱보들의 식탁"은
17세기 네델란드 황금기에 삶속으로 돌아온 화가들의 작품이다.
"뚱보들의 식탁"
얀 스테인
1660년대 후반
목판에 유채
PhotoⒸLIECHTENSTEIN. The Princely Collections, Vaduz–Vienna
풍속화가인 얀스테인은 여관운영과 그림작업을 병행하였다.
덕분에 사람들이 어울려 있는 여관의 모습을 많이 그렸고
특유의 태평스럽고 쾌활한 분위기의 그림이 많다.
스림에서 햄을 썰고 있는 사람은 스테인 자신이고,
큼직한 의자에 앉아있는 여인은 그의 부인이다.
"릭토르를 보내는 데키우스 무스"
피터르 파울 루벤스
얀 라스 2세 공방 (태피스트리)
1640경
울, 실크
태피스트리(tapestry)는 여러가지 색실을 사용하여 그림을 짜 넣은 직물이다.
루벤스가 ㅗ할활동하는 시대에는 곳곳에 직조공장이 있었다.
루벤스는 동시대뿐만 아니라, 후대의 화가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으며 예술적 자극과 영감이 되었다.
특히 그의 색채감각은 17세기 후반, 색채를 감동의 근원으로 삼는 이른바 ‘루벤스 화파’의 성립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18세기 프랑스의 와토와 부셰의 로코코 양식으로 이어졌으며,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낭만주의의 대표 화가인 프랑스의 들라크루아는 루벤스는 자신의 예술적 멘토로 여겼다.
루벤스가 고안해낸 모티프들은 후대의 회화에 광범위하게 수용되어 세잔, 반 고흐, 피카소 등 근대 화가들의 작품에서까지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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